섹션소개

남도영화제 시즌1 순천 2023.10.11 ~ 10.16

[김승옥, 霧津, 안개]

김승옥은 해방 이후 형성된 청년 인텔리의 감수성을 대표해온 작가다. 1960년에 김승옥과 함께 서울대 문리대에 재학 중이었던 문학도들―김현, 김지하, 이청준 등―은 한국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9세대’와 함께 ‘한글세대’¹라는 말이 문학사에서 일반화된 것은 그들의 위상과 관계 깊다. 그리고 그 세대 “감수성의 혁명”²을 이끈 이로 김승옥이 맨 앞자리에 놓인다. 그러나 김승옥의 문단 활동은 명성에 비해 짧았다. 그는 1960년대 초중반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1966년에 첫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을 내며 문명을 떨쳤지만 장편 연재가 거듭 중단되면서 20대에 발표한 작품들이 대표작이 되었다. 그 중 「무진기행」은 한국문학 앤솔로지에 빠지지 않는 정전이다.

「霧津紀行」은 1967년에 〈안개〉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어 영화로도 성공했다. 김승옥이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고 문학계 인사들이 영화 제작을 주도한 것도 이 영화의 화제성에 한몫했다. 이에 힘입어 1974년에 〈황홀〉, 1986년에 〈무진 흐린 뒤 안개〉이라는 제목으로 거듭 리메이크된다. 이때에도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맡았다. 〈안개〉의 성공은 1968년 〈감자〉를 통해 ‘김승옥 감독’이 탄생하는 데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1970년대까지 약 10년 동안 김승옥은 영화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문학계에서는 이 10년을 ‘침묵’ 내지 ‘외도’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그가 「무진기행」의 영화화 이외에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영화 몇 편―〈장군의 수염〉(1968), 〈영자의 전성시대〉(1975), 〈겨울여자〉(1977) 등―만 열거해도 그렇게 간단히 평가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안개〉는 며칠 간 고향을 찾은 제약회사 상무와 그 곳 여교사의 짧은 사랑 이야기다. 제약회사 사장 딸(이빈화)과 결혼한 윤기준(신성일)은 아내 덕분에 젊은 나이에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는 전무이사로 승진하게 될 주주총회를 앞두고 아내의 권유로 고향 무진에 내려간다. 그는 무진에서 세무서장이 된 친구 조한수(이낙훈)와 시인이자 교사인 후배 박(김정철), 그리고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을 만난다. 조한수와 후배 박은 모두 하인숙에게 마음이 있다. 다만 후배 박은 하인숙을 사모하고 있는데, 결혼을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조한수는 결혼할 경우의 손익을 따지고 있다.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기준과 인숙은 서로에게 끌린다. 집에 가는 길에 인숙은 기준에게 오빠라 부를 테니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기준은 “명산물이라고는 안개뿐인 무진”을 간절히 탈출하고 싶어 했던 과거의 자신을 인숙에게서 본다. 다음 날 기준은 인숙과 사랑을 나누고 서울로 그녀를 데려갈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급히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가 오자 기준은 인숙에게 인사도 없이, “배반과 무책임을 긍정하며” 무진을 떠난다.

항상 안개가 끼어 있는 가상의 도시 무진(霧津)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주인공의 이름이 ‘희중’에서 ‘기준’으로 바뀐 것 외에는 대부분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캐릭터, 사건, 대사는 물론 기준의 내레이션을 활용하여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기법은 “유럽영화와 같은 무드”로 수용되었고, 이 영화는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클로드 를루슈, 1966)에 견줄 만한” 작품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한국영화 여기까지 왔다”는 포스터의 문구는 이 영화를 둘러싼 자부심을 함축한다. 이후 오랫동안 〈안개〉는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었다.

유럽 예술영화와의 비교가 아닌,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안개〉가 새롭게 독해되는 계기는 2022년에 마련되었다.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은 주제곡 ‘안개’를 가져오고, 가상의 안개 도시를 배경으로 설정했으며, 〈안개〉와 마찬가지로 서로를 의심하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가리켜 “진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표현한 바 있다. 어른은 사회에서 주어진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그에 맞춰 페르소나를 바꿀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른은 투명하기 힘들다. 더구나 “상대가 결혼했다는 이유로 좋아하기를 중단”³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관계의 국면과 소통은 겹겹이 묘연해질 수밖에 없다. 두 영화는 이런 면에서 상통한다.

그러나 〈안개〉가 철저히 남성인물의 영화였던 것과 달리, 〈헤어질 결심〉은 여주인공 서래(탕웨이)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결정한다. 기준의 내면은 충실히 들을 수 있었으나 인숙이 기준과 헤어지는 마음은 알 길이 없었다. 반면 서래는 스스로를 봉인하여 해준(박해일)의 ‘미결 사건’으로 남음으로써 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해준이 서래를 찾아 바닷가를 헤매는 장면은 말없이 떠나버린 기준을 인숙이 찾았을 장면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은 오랜 세월 합리화되어온 ‘오빠들의 배반과 무책임’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읽힌다. 그러면서 두 영화는 오마주를 넘어서는 상호텍스트성을 지니며 한국영화사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박유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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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1940년대에 태어나 해방 이후에 교육을 받음으로써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를 가리킨다. 그들은 4.19가 일어난 1960년에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재학했던 4.19세대이기도 하다.
² “감수성의 혁명”은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1966년에 김승옥의 문학적 성취를 평가하면서 말한 것이다.
³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했던 대사 “한국에서는 상대가 결혼했다는 이유로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를 인용했다.

▒ 〈안개〉에는 김승옥 작가가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기준이 타고 가는 무진 버스에 김승옥 작가 역시 타고 있다.
▒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과 서래가 데이트하는 장면은 순천 송광사에서 촬영되었다.